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고 가톨릭교회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1869년 [[교황]] [[비오 9세]]의 주도로 일어난 [[제1차 바티칸 공의회]]는 [[교황]]의 [[교황무류성|무류성]]과 [[교황수위권|수위권]]을 교의적으로 최종 확립했으며, [[공의회]]가 교황권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[[공의회 중심주의]]와 [[교황권 제한론]]을 밀어냈다. 그러자 [[독일]] 등지에서 [[진보|자유주의]] 성향의 신학자와 사제부터 반발이 터져 나왔다. 이들은 공의회가 단지 교황의 자문기관에 불과한 것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[[교황무류성]]을 부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. 결국 이런 주장을 펼친 이들은 교황무류성이 결정되기 이전의 가톨릭교회 체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명분을 표방하게 되었다. 1871년에 이르러 [[독일]] [[본(독일)|본]] 대학교 [[신학과]] 교수들이 [[교황무류성]]에 반발하여 시위와 항의를 일으켰고 이것이 독일 각지의 [[가톨릭교회]]들로 퍼져나가면서 결국 독일 가톨릭의 [[진보|자유주의]]적 신학자들인 될링거·프리드리히·로이시·슐테 등의 주도로 [[뮌헨]]에서 복고 가톨릭교도 대회를 열고 독립 교단의 창설을 선언했다. 독일에서 복고 가톨릭교회가 창립되자 이런 분위기는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 [[오스트리아]]·[[프랑스]]·[[스위스]]는 물론 [[교황청]]이 있는 [[이탈리아]]까지 복고 가톨릭교회 교단이 창립됐다. 1873년 [[유럽]] 각국의 복고 가톨릭교회들은 교황청과 관련없이 독자적으로 [[주교]]를 성성했고 1889년에 [[네덜란드]] [[위트레흐트]]에서 각국 복고 가톨릭교회들이 모여 위트레흐트 연맹을 결성하고 위트레흐트 선언을 통해 교황 수위권 부정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. 여전히 명예 수장으로 교황을 인정한다고는 했지만, 명예 수장 인정은 성공회에서도 논의했던 사안이므로 별 의미는 없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